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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일본의 걸작,마스다를 맛보다
일본에 있어서의 중세는 바다에 국경이 없는 시대였다.
산인(山陰) 지방의 서쪽 끝에 위치하는 마스다는 그 지리와 지역 자원을 활용하여 눈부시게 번창했다.
스다의 사람들은 중국이나 한반도에 가까운 지리와, 주고쿠 산지(中国山地)에서 산출되는 재목이나 광물 등의 자연 자원을 활용하여 동해를 무대로 교역을 행했다.
영주인 마스다 일족은 그 스스로도 무역에 적극적으로 관여를 하여, 우수한 정치 수완을 발휘하며 평화를 실현했다.
경제적 변영과 정치적 안정과 함께 동아시아의 영향도 받아 마스다 특유의 문화가 꽃 피었다.
현재의 마스다에는 그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항구, 성, 저택의 유적과 경관, 사원이나 신사, 거리, 정원, 회화, 불상 등의 일급 문화재가 대량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시대와 지역의 특성을 활용하여 빛났던 마스다는 중세 일본의 걸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스다는 전국에서도 흔하지 않은 중세 일본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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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중세 일본의 걸작,
마스다를 맛보다
지방 시대에 다시 빛나다
지방의 영웅, 마스다
산인(山陰)지방이 서쪽 끝에 위치한 마스다시는 깊고 깊은 주고쿠 산지(中国山地)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제일가는 맑은 물인 다카쓰강(高津川)과 마스다강(益田川)이 흐르고, 해안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있는 사주가 펼쳐져 있는 등 자연이 풍부한 토지이다. 마스다는 해로, 육로 어느 쪽으로도 교통과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또한 이러한 자연은 아름다운 경관뿐 아니라 매력적인 역사도 탄생시켰다.
지금으로부터 800에서 400년 전, 일본의 각 지방에서 영주가 힘을 키우며, 바다에 국경이 없는 시대, 즉 중세의 마스다는 그 지리와 지역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눈부시게 번창했다.
동해로 배를 저어갔던
마스다의 사람들
중세의 마스다 평야에서는 다카쓰강(高津川)이 마스다강(益田川)과 합류했다. 강의 흐름이 실어다 주는 모래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지형(사주나 석호)은 동해의 거센 파도와 바람을 피하기에 적합했다. 그 때문에 중세의 마스다는 항구 도시로서 번성했다.
나카즈히가시하라 유적(中須東原遺跡)은 그러한 항구 도시 유적의 대표적인 예이다. 발굴 조사에 의하여, 돌이 빽빽하게 깔린 뱃짐의 선적장 유적 안쪽에 대장간을 비롯하여 시가지가 늘어서 있던 당시의 항구 도시의 모습이 밝혀졌다.
또한 출토된 도자기 중에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만든 것도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한반도와 중국,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와 교역을 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하천은 교역과도 관련되어 있다. 타카츠 강이나 그 지류인 히키미강(匹見川) 상류에는 풍요로운 주고쿠 산지(中国山地)가 펼쳐져 있다. 히키미 지역의 산림에서는 양질의 목재를 풍부하게 채취할 수 있다. 목재는 강을 이용하여 운반해서 다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또한 마스다 강 상류의 쓰모 광산(都茂鉱山)의 광물도 마찬가지로 교역품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중세의 마스다는 사람과 물자 교류의 최전선이었다. 사람들은 그 풍부한 지역 자원과 중국, 한반도에 가까운 입지 조건을 활용하여 동해로 배를 저어 나가 적극적으로 국내외와의 교역을 행했던 것이다.
영주 마스다 일족의 실력
마스다강(益田川)을 거슬러 올라, 평야부에서 산간부로 들어가기 직전에 역사가 있는 거리가 남아 있다. 이 거리를 만든 것은 중세의 마스다를 지배했던 영주인 마스다 일족이다.
마스다 일족은 우수한 정치 수완을 발휘하여 마스다의 평화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전국 시대의 다이묘(大名)인 모리 일족(毛利氏)과 관계가 악화된 후, 화친할 때에는 한반도의 호랑이 가죽을 비롯하여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 또한 에조치(蝦夷地, 현재의 홋카이도)의 다시마와 말린 청어알, 지역의 특산품으로 다카쓰강(高津川)에서 잡은 은어나 우루카(은어의 알이나 창자로 만든 젓갈) 등을 재료로 한 호화로운 요리를 대접했다. 이것은 동해 무역에 대한 자신의 적극성과 경제력을 인상에 남기고자 했던 목적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이 일이 있은 후, 마스다 일족은 모리 일족에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매우 깔끔하고 훌륭한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스다 일족의 힘의 크기는 산성, 저택 유적이나 성 아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서로 높이 약 5m 정도의 토루를 가진 저택인 미야케오도이(三宅御土居) 유적이나, 하나의 산을 통째로 요새화한 산성 나나오성(七尾城)의 유적은 같은 규모의 영주와 비교했을 때 훨씬 크다. 또한 나중에 언급할 특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꽃을 피운 독특한 문화
번영과 평화를 기반으로 마스다에 원래 있던 문화에 교토나 야마구치, 동아시아의 영향을 더해서 마스다에는 우수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마스다 일족은 절과 신사를 극진하게 보호했다. 마스다 일족이 창건한 만푸쿠지(萬福寺)의 본당이나, 재건한 소메하아메노이시카쓰 신사(染羽天石勝神社)의 본전은 당시의 사원·신사 건축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형태를 갖고 있다.
마스다에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별로 개성적인 불상이 현존하고 있다. 그것들은 당시의 일본의 중심이었던 교토의 유행을 받아들이면서도 지방색도 진하게 남아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중국에 건너 가 수묵화 실력을 갈고닦은 셋슈(雪舟)가 마스다에 초대되었다. 셋슈는 만푸쿠지와 스칸지(崇観寺, 나중에 이코지(医光寺)로 계승됨)에 정원을 만들고, 마스다 가네타카(益田兼堯)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것들은 모두 셋슈의 대표작이 되었으며, 두 곳의 정원은 사계절 내내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또한 교역에서 입수한 차단지(茶壺) 등도 마스다의 문화의 풍요로움을 전해준다. 만푸쿠지에 전해져 오는 화남삼채병(華南三彩壺)은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에서 입수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중세를 맛볼 수 있는 거리 마스다
마스다 일족은 에도 시대 초반에 마스다를 떠나게 되어, 마스다는 에도 시대에 조카마치(城下町, 성 근처에 만들어진 마을이나 도시)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에도 시대에 조카마치로서 재개발되지 않고, 중세의 거리가 그대로 남았다.
현재의 마스다의 거리는 일본의 다른 전통적인 거리와는 조금 모양새가 다르다. 예를 들어 장화를 옆으로 쓰러뜨린 듯한 형태라고 일컬어지는 저택 유적이나, Y자 형의 산등성이에 세워진 산성 유적. 직선과 곡선이 뒤섞인 길이나 삼각형의 구획 등. 그것은 지형이나 고대 이래의 신사와 도로 등을 크게 고치거나 바꾸지 않고 세워진 중세의 거리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전국에서 가장 중세의 유산이나 거리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곳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시대와 지역의 특성을 살려 빛났던 마스다의 역사는 중세 일본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하고 우수한 일급 문화재가 한꺼번에 존재하고 있는 마스다는 중세 일본을 맛볼 수 있는 거리이다.